003 화초가 죽어가고 있다. 화초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라.
언젠가 식물원에 간 날이 있었다. 간 이유는 별 거 없었다.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너무 지루했고, 해야하는 것들은 없었으며, 무엇보다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주머니엔 몇 푼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몇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른 것이 식물원이었다. 동기는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단 얘기다.
온갖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공기는 신선했으며 살짝 습하기는 했지만, 근래 볼 수 없었던 것들 것 넘쳐났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조금 설레고 있었다. 다만 사람들도 많았고, 그 중 유독 커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것만 짜증나 있었다. 이 밖에서도 혼자인데, 여기서도 혼자라니. 그래도 이왕 돈 내고 온 거,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뒤에서 개념 없는 한 쌍이 시끄럽게 떠들어댔고, 가끔씩 툭툭 나를 건들었다. 그들은 그때마다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하지만 여러 번 반복되자, 이것이 고의인듯 고의 아닌 고의 같이 느껴졌다.
짜증이 났다. 집에나 그냥 가버리자는 욕구와 그래도 이왕 온 김에 다 둘러보고 가자는 욕망이 내 안에서 다투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갈등의 발걸음을 내딛는 그 때였다.
그녀를 본 것이다.
단발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가 지나다니는 여러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온종일 미소를 짓고있는 듯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지쳐보였다. 곧이어 나와도 눈을 마주쳤고,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 붐비는 사람들 사이로 껴들어가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내가 그녀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그녀는 나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조금… 목이 마르네요.” 라고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요. 제가 가서 물을 가져올게요.”
나는 근처에 보이는 매점에서 물 한 통을 사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목이 많이 말랐는지, 한 통을 금새 해치웠다.
“고마워요. 이제 정신 좀 차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굉장히 밝게 웃어주었다.
내가 그녀와 대화를 나눈 것은 이것이 전부다. 이 이상 말을 하지도 않았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도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서로가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나는 그 후로 매일같이 식물원으로, 아니 그녀에게로 갔다. 단지 그녀를 보기 위해서. 그녀는 항상 식물원에서 있었기 때문에 가기만 한다면, 언제든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볼 때면 항상 같은 미소를 보여주었고, 가끔 물이 필요하다는 것 말고는 부탁하는 것이 없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 한 달이 지나있었다. 내가 그녀를 알고 지낸지 한 달이 지나있었다. 그녀를 보면서 무언가를 잊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전혀 되찾지 못했을 그것. 나는 그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이루려면 나는 필연적으로 그녀와 헤어져야만 했다. 나는 나를 더 사람답게 만들기 위해 그것을 되찾아준 그녀를 배신해야만 했다.
그렇게 결심했을 때, 그녀를 찾아가진 않았다. 이해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렇게 생각도 했다. 어차피 몇 마디 나눠보지도 않았는데, 곧 잊겠지. 나한테조차 사랑을 받았으니, 그녀를 알아볼 자격 넘치는 누군가가 넘쳐날 것이라고 믿었다.
나를 갱생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든 매진했다. 가만히 있으면 그녀가 생각날 것 같아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 줄 모르고 나는 온 집중을 나에게만 쏟았다.
내가 그녀를 다시 생각할 수 있었을 때는 그로부터 2년이 흘렀을 때였다. 전보다 괜찮은 남자가 된 걸까.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비교도 말라면서, 그들은 하나같이 고생했다고 말한다. 모두들 그렇게 말하니, 자신감이 생긴다. 그 질문을 그대로 가져가서 그녀에게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고생했다고, 다른 이들처럼 말해줄까. 이상하게 확신은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을 때는 확실했는데. 더군다나 그녀가 여전히 그곳에 있을까. 그것조차 확신이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녀에 대한 모든 불확실함을 이고 나는 식물원으로 갔다. 굉장히 떨렸다. 혹시 몰라 그녀에게 줄 물을 미리 사갔다. 2년만에 가본 식물원의 겉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안심시킨다. 입구에 들어서니 예전에 맡았던 향도 그대로다. 그것 또한 나를 안심시킨다. 무엇보다 나를 안심시킨 것은 저 멀리서 보이는 그녀였다. 나도 모르게 달려간다. 반가움에 빨라진 발걸음은 점점 절망감에 느려져갔다. 그녀는 쓰러져서 일어설 기운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제야… 오셨네요.”
“나를 기다린거야?”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에게 물을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물을 마실 힘조차 없어보였다. 나는 억지로라도 그녀에게 물을 부어 입부터 적셨다.
“여전히 친절하시네요.”
“바보같이… 아무 말 하지마.”
“올 거라고 믿었어요.”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나도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은 뭐야?”
그녀는 힘들지만 여전한 미소를 보여주며 말했다.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나랑 같이 살래?”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녀의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마침내 또르륵 흘렀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들고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내가 있는 한 그녀는 말라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 언제라도 그녀는 내가 보살필 것이기에. 항상 싱그러운 모습으로 엘리자베스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최근에 은혼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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